류탸오후사건,柳條湖事件,이후 관동군(關東軍) 군사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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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탸오후사건,柳條湖事件,이후 일본 관동군 행보
The Liutiaohu Incident, and subsequent military actions of the Kwantung Ar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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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탸오후사건,柳條湖事件 당시 일본 세력권 |
1. 사건 개요
장소: 중국 만주 펑톈(奉天, 지금의 선양) 근처의 류탸오후 철도 부근
내용: 일본 관동군이 자신들이 관리하던 남만주철도 일부 구간을 폭파하고, 이를 중국군의 소행이라 조작.
목적: 만주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함.
2. 일본군의 즉각적인 군사 행동
사건 직후 일본은 중국 측의 공격이라고 주장하며, 사전 계획된 군사 작전을 개시했습니다.9월 19일 새벽:
관동군은 이미 준비해둔 작전계획에 따라 펑톈(奉天)을 기습 점령.
곧이어:
창춘(長春), 지린(吉林), 단둥(丹東) 등 주요 도시를 연쇄 점령.
약 5개월 만에:
1932년 2월까지 만주 전역을 군사적으로 장악.
이 모든 과정은 도쿄 정부의 명령 없이, 현지 일본군이 독자적으로 진행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곧 묵인·승인하여, 사실상 국가적 침략으로 전환됩니다.
3. 괴뢰국 ‘만주국(滿洲國)’ 수립
1932년 3월 1일: 일본은 점령지에 ‘만주국’을 세움.형식상 황제: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옹립 → “국가 재건” 명분.
실질적 통치: 일본 관동군 사령부가 직접 통제.
이념 선전: “오족협화(五族協和)”와 “왕도낙토(王道樂土)”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식민 지배.
4. 국제적 반응
국제연맹 조사단(리튼 조사단) 파견 (1932년 3월).1933년 보고서: 일본의 군사행동은 자위가 아니라 침략임을 인정.
일본은 이에 반발해 1933년 3월 국제연맹 탈퇴.
→ 이후 국제적 고립이 심화되고, **중·일 전면전(1937년 노구교 사건)**으로 이어짐.
5. 류탸오후 사건 이후 일본군의 ‘행보 요약’
주요 행보설명1931.9 류탸오후 사건 조작 -> 만주사변 발발
1931.9~1932.2 만주 전역 점령 군사 작전 완료
1932.3 만주국 수립 괴뢰 정부 설치
1933 국제연맹 탈퇴 침략 노선 고착
1935~1936 화북 진출, 항일세력 탄압 중국 내 영향력 확대
1937 노구교 사건 → 중일전쟁 전면전으로 확전
6. 일본군의 정치적 평가
류탸오후 사건은 일본 제국주의가 침략을 ‘사건’으로 위장한 대표적 사례로 평가됩니다.
이 사건 이후 일본군은
군의 독단적 정치 개입 강화
만주를 자원 공급 기지이자 대륙 침략 전초기지로 활용
결국 태평양 전쟁(1941)으로 가는 제국주의 팽창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군의 독단적 정치 개입 강화
만주를 자원 공급 기지이자 대륙 침략 전초기지로 활용
결국 태평양 전쟁(1941)으로 가는 제국주의 팽창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 군사력
류탸오후 사건(1931) 전후의 당시 일본군 군사력은 이미 “전시 수준”에 가까웠습니다.이 시기 일본은 명목상으로는 평시였지만, 관동군(關東軍)을 중심으로 대륙 침략 준비를 거의 완료한 상태였습니다.
이어서 사건 당시의 일본군 군사력, 조직 구조, 장비, 병력 규모 등을 정리합니다.
1. 전체 일본군의 개요 (1931년 기준)
육군 병력 ⇒약 26만 명 (본토 기준)해군 병력 ⇒약 6만 명
예비군 및 지원 병력 포함 시 ⇒약 100만 명 규모의 동원 가능 인원
주요 군 조직⇒ 육군성(陸軍省), ⇒참모본부(參謀本部),⇒ 각 군관구, ⇒관동군
지휘 체계 특징 군령권이 천황 직속 ⇒ 내각보다 군의 독자 행동 가능 (류탸오후 사건 때도 이를 이용)
이 부대는 명목상 철도 보호부대였지만, 사실상 침략 선봉 부대로 운영되었습니다.
관동군 규모
2. 관동군(關東軍)의 전력
류탸오후 사건의 주도 세력은 일본 본토군이 아니라 만주 주둔 관동군이었습니다.이 부대는 명목상 철도 보호부대였지만, 사실상 침략 선봉 부대로 운영되었습니다.
관동군 규모
주둔지⇒ 남만주(랴오닝·지린·헤이룽장 일대)
병력 규모 ⇒약 1만 1천 명 (사건 당시)
지휘관⇒ 혼조 시게루(本庄繁) 중장
주요 전력⇒ 보병 2개 여단, ⇒포병 1개 대대, ⇒기병 1개 대대, ⇒공병·통신·수송 부대
관동군(關東軍) 특징⇒ 군수품 및 병참망 완비
※- 장비와 훈련 수준이 중국군보다 압도적임.
※- 사건 전부터 침공 작전계획 수립 완료한 상태.
3. 관동군(關東軍)주요 무기-장비
장비 종류와 명칭 ⇒소총 아리사카 소총 (三八式, 99식 등) – 신뢰성 높음
기관총 ⇒92식 중기관총 (“열차포”)
포병 ⇒75mm 야포, 105mm 곡사포
전차⇒ 89식 중전차, 92식 장갑차 등 초기형 전차 보유
항공기 ⇒약 200기 (정찰기·폭격기 중심, 90식 정찰기 등)
기동력 ⇒철도·트럭 운송망으로 신속한 이동 가능
통신 무선통신 장비⇒ 보급률 높음 → 현장 지휘 우위 확보
👉 대항 군인 중국 동북군(장쉐량 휘하)은 당시 약 20만 명이 있었으나,
장비가 낙후되고 병사 숙련도 낮아 실질전투력은 관동군의 절반에도 못 미쳤습니다.
이처럼 관동군보다 병력수로 보면 약 20배가 넘는 압도적인 부대이지만 군대의 질이 형편없어 관동군에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밀린 결과를 보입니다.
4. 일본 해군 전력 (만주사변 직전 기준)
주력함 ⇒전함 6척, 항공모함 2척, 중·경순양함 20여 척항공기 보유 ⇒약 600여 대 (함재기 포함)
주요 임무 ⇒한반도·랴오둥만·산둥반도 연안의 해상 제압 및 병참 지원
특징 ⇒당시 세계 3위권 해군력 (영국, 미국 다음 수준)
5. 일본군 군사력의 특징 요약
① 조직적으로 준비된 침략군관동군은 “철도 방위” 명목으로 주둔했지만 실상은 전략적 전초기지였습니다.
→ 류탸오후 사건 직후 수 시간 만에 작전 개시 가능했던 이유.
② 무기 현대화와 병참 체계 완비
철도·통신 인프라, 항공 지원 체계, 야포 및 전차 운용 능력 등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현대적인 군대를 보유.
③ 독립적 군권 구조
일본 육군은 내각의 통제를 받지 않고 천황 직속 명령 체계를 이용해
사실상 “군의 독재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었음.
④ 전략 목표의 확대
만주 확보 → 자원(철, 석탄, 곡물) 기반 → 이후 화북 침공, 중국 전역 침략,
나아가 대동아공영권 구상으로 발전.
6. 중국군과의 전력 비교 (1931년 기준 요약)
| 항목 | 일본 관동군 | 중국 동북군 |
|---|---|---|
| 병력 수 | 약 1만 명 | 약 20만 명 |
| 훈련 수준 | 정예, 규율 엄격 | 지역별 편차 큼, 규율 약함 |
| 무기 | 현대화된 화기·포·전차·항공 지원 | 낡은 무기, 포병력 부족 |
| 병참·통신 | 철도·무선 통신망 완비 | 낙후, 지휘 혼선 |
| 결과 | 단기간에 만주 장악 | 사실상 저항 불가 |
1931년의 일본군은 수적으로는 적었지만, 기술,조직,기동력 면에서 압도적이었고 그 결과 류탸오후 사건 이후 불과 몇 달 만에 중국의 광대한 만주 지역을 장악하게 됩니다.
관동군 진격 개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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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동군 진격 개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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