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탸오후사건(柳條湖事件),만주사변(滿洲事變), 9·18 사변, 펑톈 사변(奉天事變), 북대영 사건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만주사변(滿洲事變), 9·18 사변, 펑톈 사변(奉天事變), 북대영 사건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 또는 유조호 사건)은 만주사변(滿洲事變), 9·18 사변, 펑톈 사변(奉天事變), 북대영 사건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 사건은 일본 관동군이 만주 침략을 위한 구실로 조작한 사건을 가리키며, 1931년 9월 18일 만주 펑톈(奉天) 교외의 류탸오후(柳条湖)에서 철도 폭파 사건을 일으킨 것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류탸오후 사건의 다른 이름들 해설.
만주사변(滿洲事變): 일본이 류탸오후 사건을 조작하여 만주를 침략한 전쟁 전체를 일컫는 명칭입니다.
9·18 사변(九一八事變): 사건이 일어난 날짜인 1931년 9월 18일에서 따온 이름으로, 중국에서 주로 사용합니다.
유조호 사건(柳條湖事件): 한자 독음을 한국식으로 읽은 명칭입니다.
펑톈(奉天)사변: 사건이 발생한 지역인 봉천(지금의 선양)의 이름을 따서 부르기도 합니다.
북대영(北大營) 사건: 일본군이 사건을 빌미로 중국군 병영인 북대영을 공격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 개요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 또는 유조호 사건)은 1931년 9월 18일 밤, 만주를 침략하려는 일본 관동군이 만주 봉천(현 선양) 근처의 류탸오후에서 남만주 철도 선로를 폭파한 자작극입니다. 일본은 이 사건을 중국 군대의 소행으로 조작하여 만주 침략의 구실로 삼았으며, 이는 만주 사변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 의 전개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 유조호 사건)배경: 1930년대 초, 일본은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 위기를 겪고 있었고, 만주 지역의 이권을 둘러싸고 중국 국민당과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만주를 장악하기 위해 일본 군부 내 강경파들이 침략 계획을 세웠습니다.
사건 발생: 관동군 작전 주임참모 이시하라 간지 등이 계획한 대로,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20분경 관동군 후스타이 독립수비대 소속 부대가 류탸오후의 만철 선로를 폭파했습니다.
공격 감행: 일본군은 현장에 중국 군복을 입은 시체를 놓아두는 등 중국 군대의 소행으로 위장하고, 곧바로 봉천에 주둔하던 중국 동북군 막사인 북대영을 공격했습니다.
만주 점령: 당시 장쉐량의 동북군은 장제스의 불간섭 정책에 따라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관동군은 손쉽게 봉천 비행장 등 주요 거점을 점령하며 만주 전역을 빠르게 장악해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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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 또는 유조호 사건)의 결과
만주사변 발발: 류탸오후 사건은 일본의 만주 침략 전쟁인 만주 사변으로 이어졌습니다. 일본은 약 5개월 만에 만주 대부분을 점령했습니다.
만주국 수립: 1932년 3월, 일본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워 괴뢰국인 만주국을 수립했습니다.
국제 사회의 반응: 국제 연맹은 1932년 리튼 조사단을 파견해 만주 사변이 일본의 침략 행위임을 인정하고 만주국을 불승인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불복하여 국제 연맹을 탈퇴했습니다.
군국주의 강화: 이 사건은 일본 군부의 독단적인 행동이 정부를 통제하고 확대되면서 중일 전쟁, 나아가 태평양 전쟁으로까지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류탸오후 사건은 부르는 사람과 국가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는 사건의 성격과 해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지역 과 역사적인 표현
유조호 사건 (柳條湖事件): '류탸오후'는 한국식 한자 발음으로, 한자 '柳條湖'를 그대로 읽은 것입니다. '버드나무 류', '가지 조', '호수 호'로, 사건이 발생한 봉천(지금의 선양) 부근 지명에서 유래했습니다.
류타오거우 사건 (柳条沟事件): 중국의 위키백과 등에서는 '류타오거우 사건'으로도 표기하는데, '류탸오후'와 같은 지명을 다른 방식으로 부른 것입니다.
9·18 사변 (九一八事变): 중국에서는 사건이 일어난 날짜인 1931년 9월 18일을 따서 '9·18 사변'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일본의 침략 행위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의 결과와 의미를 강조하는 표현
만주사변 (滿洲事變): 일본은 이 사건을 계기로 만주 전역을 점령했는데, 이 전체 과정을 통틀어 '만주사변'이라고 부릅니다. 류탸오후 사건은 만주사변의 시작을 알리는 도화선 역할을 한 사건입니다.
북대영 사건 (北大營事件): 류탸오후에서 철도 폭파 자작극 직후 일본군이 중국군 막사인 북대영을 공격하면서 사건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공격 대상이었던 북대영의 이름을 따 '북대영 사건'이라고도 부릅니다.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추가 정보
용어의 중립성: 과거에는 일본이 사용한 용어인 '만주사변'이 널리 쓰이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일본의 침략 행위를 부각하기 위해 중국에서 쓰는 '9·18 사변'이나 '만주 침략 전쟁' 같은 표현도 자주 사용됩니다.
만보산 사건과의 관계: 류탸오후 사건과 같은 해인 1931년 만주 만보산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물 분쟁이 발생했는데, 이는 류탸오후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으나, 당시 일본의 만주 침략을 위한 긴장 고조의 일환으로 언급되기도 합니다.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 이후
만주사변 (滿洲事變)시작
류탸오후 철도 폭파는 1931년 9월 18일 밤 22시 20분 경, 일본 관동군 후스타이(虎石台) 독립수비대 제2대대, 제3중대가 실행했습니다.
류탸오후 분견대 대대장 가와모토 스에모리 중위는 1개분대를 펑톈 북쪽 약 7.5 Km의 류탸오후 남만주철도 노선에 파견하여 소형폭약을 장치한 후 폭파시키도록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철도의 작은 부분이 폭파되었습니다. 또한 중국 동북군 군복을 입은 중국인 시체 3구를 현장에 방치하여, 이를 철도폭파가 중국인의 소행이라는 증거로 삼으려고 의도했습니다.
폭파후, 가와모토는 즉각 동북군 북부 사령부를 향해 사격하였고, 일본군 독립수비대에 "동북군의 중국군이 철로를 폭파하고 수비대를 공격했다."고 보고했습니다. 독립수비대는 이를 즉각 관동군 사령부에 보고했고,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중국군을 향해 대응발포하고, 동북군 사령부와 펑톈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당시 동북군의 대응
일본군은 동북군을 기습했으나,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동북군 제7여단은 무방비 상태였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동북군 사령관이었던 장쉐량은 휘하 부대에게 일본군의 확전 의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도발에 대응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려서 사령부 주둔부대는 반격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7여단의 3개 연대중, 2개는 지시대로 철수했고, 왕티에한의 620연대는 철수명령을 받지 못해 대응사격을 했으나, 최후에는 포위망을 뚫고 철수했습니다.
무대응 명령 때문에, 동북군 북부 사령부는 1만 명이 넘는 병력을 가지고도 500여 명의 일본군에게 격퇴되었습니다. 이후 펑톈과 동부사령부에서도 역시 대응없이 철수하였고, 이들은 일본군에게 점령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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