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상하이 사변(第一次上海事變) ,1·28 항전,상하이 사변 (上海事變)

제1차 상하이 사변(第一次上海事變) ,1·28 항전(1932년)

이 전쟁의 정확한 명칭

영어로는 First Shanghai Incident 또는 January 28 Incident로 부릅니다.
제1차 상하이 사변의 명칭은 상하이 사변(上海事變), 또는 '일이팔 사건'입니다. 
1932년 1월 28일에 사건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중국은 이를 '일이팔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상하이 사변 (上海事變): 사건이 일어난 장소인 상하이와 군사적 충돌을 의미하는 '사변'을 합친 명칭입니다.
일이팔 사건 (一二八事件): 1월 28일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의미로, 중국에서 사용하는 명칭입니다.
제1차 상하이 사변: 1937년에 일어난 제2차 상하이 사변과 구분하기 위해 '제1차'를 붙여 부르기도 합니다. 

제1차 상하이 사변(第一次上海事變) ,1·28 항전,상하이 사변 (上海事變)
제1차 상하이 사변(第一次上海事變) ,1·28 항전,상하이 사변 (上海事變)


기간: 1932년 1월 28일 ~ 3월 3일
배경: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중국 내 거센 항일 운동이 벌어지자, 일본 측이 일본인 승려 구타 사건을 조작하여 이를 빌미로 상하이 국제 공동조계 주변에서 무력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결과: 약 5주간의 전투 끝에 양국 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으나, 상하이의 자베이(閘北) 구역 등은 폐허가 되었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는 1937년 전면전의 전초전 성격을 가집니다. 

제1차 상하이 사변은 1932년 1월 28일부터 5월 5일까지 중국 상하이에서 일본 제국 해군 육전대와 중화민국군(주로 제19로군) 사이에 벌어진 무력 충돌입니다. 중국에서는 이를 '1·28 항전'이라고 부릅니다. 


제1차 상하이 사변 주요 내용

기간: 1932년 1월 28일 ~ 1932년 5월 5일
배경: 1931년 만주사변으로 만주를 침공한 일본이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자, 이목을 분산시키고 상하이 조계지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무력 충돌을 유도했습니다. 

일본인 승려 피습 사건을 빌미로 삼았으나, 이는 일본 측이 중국인을 고용하여 조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1차 상하이 사변 경과:

일본 해군 육전대가 상하이 북부 지역의 중국군 주둔지에 공격을 가하며 시작되었습니다.
예상과 달리 중국의 제19로군은 격렬하게 저항하며 일본군의 공세를 저지했고, 전투는 한동안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일본은 전차와 항공기 등 우수한 무기를 동원하고 추가 병력을 증파하여 공세를 강화했습니다.
치열한 시가전 끝에 중국군은 방어선을 후퇴시켰지만, 일본군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제1차 상하이 사변 결과 및 영향:

국제연맹의 중재로 1932년 5월 5일 상하이 정전 협정(송호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일본군은 철수하고 상하이 일대는 비무장 지대가 되었으며, 중국은 상하이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만주사변과 함께 일본의 대륙 침략 야욕을 보여주는 전초전 성격을 가지며, 이후 중일 전쟁(1937년)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또한, 중국의 강력한 항일 의지를 국제 사회에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가 이 전투의 전승 축하 기념식장에서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켜 국제적인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제1차 상하이 사변 당시 양측의 병력 및 무기 규모와 주요 지휘관 정보.

중국군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주요 부대: 제19로군(十九路軍) 및 제5군
병력 규모: 약 50,000명
무기: 주로 소총, 경기관총 등 기본적인 보병 무장 중심이었으며, 일본군에 비해 전차, 항공기, 해군력 등 중무기가 크게 열세였습니다.

주요 지휘관:
장광나이 (蔣光鼐): 제19로군 총사령관
차이팅카이 (蔡廷鍇): 제19로군 군장(군단장)
장즈중 (張治中): 제5군 군장 

일본군 (일본 제국군) 
주요 부대: 해군 육전대(초기), 이후 육군 상하이 파견군(제9사단, 제11사단 등) 증파
병력 규모: 초기에는 해군 육전대 소규모 병력으로 시작했으나,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여 최종적으로 30,000명 이상, 최대 9만 명까지 증파되었습니다.


제1차 상하이 사변 무기:

함선: 80척의 군함이 동원되어 해상에서 포격을 지원했습니다.
항공기: 약 300대의 항공기가 동원되어 제공권을 장악하고 폭격을 가했습니다.
전차/장갑차: 20여 대의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워 시가전에 투입했습니다.

제1차 상하이 사변 주요 지휘관:
시오자와 고이치 (塩沢幸一): 초기 일본 해군 제3함대 사령관(소장)
시라카와 요시노리 (白川義則):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대장), 윤봉길 의거로 사망
타시로 간이치로 (田代皖一郎): 상하이 파견군 참모장 


일본군 최고 계급: 육군 대장 (大将)
전투 초기에는 해군 소장 시오자와 고이치(塩沢幸一)가 현지 해군 육전대를 지휘했으나,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자 일본 육군은 대규모 병력을 증파했습니다.
이후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육군 대장이 신설된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전체 일본군 작전을 지휘했습니다. 

중국군 최고 계급: 육군 군장(軍長) 

중국 국민혁명군의 상하이 방어 병력은 주로 제19로군(장광나이 총사령관, 차이팅카이 군장)과 이후 증원된 제5군(장즈중 군장)이었습니다.

당시 국민혁명군의 군장(軍長)은 현대 군대의 군단장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계급은 명확한 '대장' 체계와는 다르지만 사실상 야전군을 지휘하는 최고위 지휘관이었습니다. 
이들은 일본군의 대장에 상응하는 지휘권을 행사했습니다. 장광나이는 총사령관 직책을 맡았습니다.

제1차 상하이 사변 당시 양측의 손실 정도

제1차 상하이 사변(1932년 1월 28일 ~ 5월 5일) 당시 양측의 정확한 전체 사상자 수는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습니다.

대략적인 추정 손실 규모. 

이 전투는 중국군의 예상 밖의 격렬한 저항으로 일본군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중국군 (국민혁명군 제19로군 중심): 약 4,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본군에 비해 병력과 장비가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격렬하게 항전했습니다.

🧝일본군 (해군 육전대 및 증원된 육군):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일본군 역시 약 3,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며 예상보다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 일본군 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 중상을 입고 사망했습니다.
이 사변은 일본군에게 예상치 못한 큰 타격을 주었으며, 결국 국제 사회의 중재로 상하이 정전 협정을 체결하고 일본군이 철수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제1차 상하이 사변 ,1·28 항전 요점정리

날짜: 1932년 1월 28일
장소:    중화민국 상하이
결과: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
 
교전국 당사자
중화민국:일본 제국 일본 제국

지휘관
중화민국 장광내 VS 일본 제국 시라카와 요시노리

이전쟁도 전간기(戰間期)의 한 부분입니다.
전간기(Interwar period,  戰間期),  인터벨룸(Interbellum)은 제1차 세계 대전 종결에서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까지 즉, 기본적으로는 1918년 11월 11일에서 1939년 9월 1일까지의 시대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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