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가장 대담한 맥아더의 전술! 인천상륙작전(仁川上陸作戰):크로마이트 작전, Operation Chromite

20세기 가장 대담한 맥아더의 전술! 인천상륙작전(仁川上陸作戰):크로마이트 작전, Operation Chromite

인천상륙작전(仁川上陸作戰, Operation Chromite)은 6·25 전쟁 중인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주도로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해 북한군의 병참선을 차단하고 전세를 역전시킨 결정적인 군사 작전입니다. 7만 5천여 명의 병력과 261척의 함정이 투입된 이 작전은 서울 탈환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주도로 감행된 인천상륙작전(크로마이트 작전)은 6·25 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결정적 작전입니다. 
낙동강 방어선에 집중된 북한군의 배후를 찔러 9월 28일 서울을 조기 수복하고, 북한군의 병참선을 차단하여 전쟁의 주도권을 유엔군이 가져오게 한 역사적 위대한 작전입니다.

20세기의 가장 대담한 맥아더의 전술! 인천상륙작전(仁川上陸作戰):크로마이트 작전, Operation Chromite
20세기의 가장 대담한 맥아더의 전술! 인천상륙작전(仁川上陸作戰):크로마이트 작전, Operation Chromite

仁川上陸作戰 작전명: 크로마이트 작전 (Operation Chromite)


✔ 일시: 1950년 9월 15일 새벽
✔ 지휘관: 미국 제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 규모: 유엔군 261척의 함정과 약 7만 5천 명의 병력 투입
✔ 암호명: 크로마이트 작전 (Operation Chromite)
✔ 상륙지점: 인천 월미도(녹색 해안), 인천항(적색/청색 해안)
✔ 핵심 의의: 낙동강 방어선에서 반격의 계기 마련, 북한군 보급로 차단 및 서울 수복.
✔ 주요 내용 및 의의:배경: 6·25 전쟁 초기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밀린 상황에서,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북한군의 배후인 인천을 기습 공격.1950년 6월 말 서울 함락 후 전세가 불리해지자 맥아더 장군이 적 후방 차단을 구상함
✔ 준비: 초기 '블루하츠(Blue Hearts)' 작전이 수립되었으나 상황 변화로 취소되고, 이후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으로 개편됨.경과: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수로가 좁은 불리한 지형 조건을 극복하고, 9월 15일 새벽 월미도에 상륙하여 5일 동안 병력과 물자를 집중 투입해 인천을 확보.

✔ 실행: 팔미도 등대 점등을 시작으로 월미도 선제공격 후 인천 해안(적색·녹색·청색 해안) 상륙 감행.
✔ 결과: 2주 후인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며 6·25 전쟁의 흐름을 완전히 바꿈성과: 낙동강 전선 북한군의 급속한 와해, 서울 수복 및 수도권 장악, 북진 작전의 발판 마련.
성공 요인: 철저한 보안, 상륙 전 대규모 함포 사격, 장사상륙작전 등을 통한 북한군 교란.


인천 상륙작전(仁川上陸作戰)-크로마이트 작전을 상기합니다.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은 한국전쟁 중 적군이 부산을 코앞에 둔 낙동강 전선에서 마지막 공격을 가하고 있을 때 인천 상륙작전, 즉 크로마이트 작전을 개시했습니다.



20세기에서 가장 대담하고 결정적인 상륙작전 중 하나라고 합니다.
여러가지 입지 조건에서 많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조수, 위험한 갯벌, 그리고 높은 장애물 등에도 불구하고, 한국 해병대와 미 해병,해군 육군 병사들은 북한군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부산 방어선을 무너뜨리기 위한 과감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제1해병사단이 선봉에 섰고, 제7보병사단, 해군 함정, 그리고 공군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 작전은 모험이었으며 결국 성공했습니다.

2주 만에 서울은 해방되었고, 완전히 허를 찔린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을 버리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천 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의 흐름을 하룻밤 사이에 바꾸어 놓은 감격적인 작전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때의 승리가 오늘날 누리는 자유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팔미도 등대 탈환, 상륙 지점별 구체적인 전투 내용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뒷받침한 팔미도 등대 사전 탈환과 세 곳의 상륙 지점별 전투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팔미도 등대 탈환 (작전의 시작)

인천항으로 들어가는 수로는 매우 좁고 위험하여, 야간에 대규모 함대가 진입하려면 등대의 불빛이 필수적이었습니다. 
✔ 주역: 미 극동군사령부 소속의 첩보부대인 켈로(KLO) 부대 (최규봉 대장 등 6인의 특공대)가 임무를 맡았습니다.
✔ 전개: 1950년 9월 14일 밤, 특공대는 북한군이 점령 중이던 팔미도에 침투하여 교전 끝에 등대를 탈환했습니다.
✔ 점등: 9월 15일 새벽 0시 12분, 꺼져 있던 등댓불을 밝힘으로써 261척의 연합군 함대가 안전하게 인천항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2. 상륙 지점별 구체적 전투 내용

상륙 작전은 조수 간만의 차를 고려하여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세 지점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구분 지점 명칭상륙 일시주요 내용 및 전투 상황

그린 비치 (Green Beach) 월미도 북서쪽 9월 15일 06:33 미 제5해병연대 3대대가 상륙. 함포 사격과 항공 폭격으로 북한군의 방어 시설을 무력화한 후 상륙하여 3시간 만에 월미도를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레드 비치 (Red Beach) 인천항 (현 대한제분 인근) 9월 15일 17:33 미 제5해병연대 주력과 국군 해병대가 상륙. 
높은 옹벽을 사다리로 타고 올라가야 했으며, 시내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적의 거센 저항이 있었으나 저녁 무렵 교두보를 확보했습니다.

블루 비치 (Blue Beach) 용현동 (현 낙섬 인근) 9월 15일 17:33 미 제1해병연대가 상륙. 진흙 갯벌로 인해 장갑차 이동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상대적으로 적의 저항이 약해 큰 피해 없이 상륙하여 경인도로를 차단하고 서울 진격로를 확보했습니다.

팔미도 등대는 현재 인천의 주요 안보 관광지로 개방되어 있으며,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인천광역시 팔미도 역사관에서 디오라마 등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상륙 부대가 인천에 도달하기까지의 경로.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 사진.
Title: Inchon Invasion, September 1950
Description: Map entitled Movement to the Objective Area, copied from The Inchon-Seoul Operation, Volume II of U.S. Marine Operations in Korea, 1950-53, page 83. It shows the route taken by the invasion forces to reach Inchon. U.S.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Photograph.
Catalog #: NH 97053

서울 탈환까지의 격전 과정, 당시 활약한 한국군 해병대의 역할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9월 18일부터 본격적인 서울 탈환 작전에 돌입했습니다. 이 과정은 단순한 진격이 아닌, 서울 도심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을 뚫어낸 처절한 격전의 연속이었습니다.


1. 서울 탈환까지의 주요 격전 과정

외곽 거점 확보 (9월 18일 ~ 21일): 
연합군은 경인가도를 따라 진격하며 김포 비행장과 영등포 등 주요 요충지를 점령했습니다. 
특히 영등포는 서울 진입을 위한 핵심 보급로로, 미 해병 제1연대가 치열한 전투 끝에 확보했습니다.

✔ 연희고지·104고지 전투 (9월 21일 ~ 24일): 서울 서쪽의 최후 방어선이었던 연희고지(안산 일대)와 104고지에서 가장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습니다. 
북한군이 요새화된 진지에서 자동화기로 완강히 저항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한미 해병대의 합동 공격으로 돌파에 성공했습니다.

✔ 시가전 및 중앙청 탈환 (9월 25일 ~ 28일): 마포와 용산 방면으로 진입한 아군은 건물마다 배치된 북한군 저항군과 가옥별 시가전을 벌였습니다. 
마침내 9월 27일 중앙청을 점령하고, 9월 28일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참석한 가운데 환도식(還都式)을 거행하며 서울을 완전히 수복했습니다.

2. 당시 활약한 한국군 해병대의 역할

한국군 해병대 제1연대는 미 해병 제1사단에 배속되어 서울 탈환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 최선봉 진격: 해병대는 익숙한 지형지물을 활용해 서울 도심 진입의 선봉에 섰습니다. 특히 104고지 탈환에서 해병 제1대대가 보여준 용맹함은 이후 연희고지 능선을 확보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 중앙청 태극기 게양: 9월 27일 오전 6시 10분, 해병대 제2대대 6중대 1소대의 박정모 소위 등 2명의 대원이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중앙청 돔 지붕에 올라가 태극기를 가장 먼저 게양했습니다. 
이는 서울 수복을 상징하는 가장 역사적인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 무적해병의 기틀: 인천과 서울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해병대는 이후 도솔산 전투 등에서 승리하며 '무적해병'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는 신화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서울 탈환 성공 중앙청 태극기 계양 한국 해병대


서울 탈환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인 중앙청 태극기 게양은 1950년 9월 27일 오전 6시 10분, 한국 해병대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1. 중앙청 태극기 게양의 주역부대: 

대한민국 해병대 제1연대 2대대 6중대 1소대
✔ 핵심 인물: 박정모 소위 (당시 소대장), 양병수 이등병조, 최국방 견습수병 등
✔ 상황: 당시 서울 시내에는 여전히 북한군 잔당의 저항과 총격이 빗발치고 있었으나, 해병대원들은 중앙청 진입을 강행했습니다. 해병대 공식 블로그 등에 따르면 박정모 소위와 대원들은 소총 사격을 뚫고 중앙청 돔 지붕까지 기어올라가 북한군이 걸어둔 인공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게양했습니다.

2. 역사적 의미와 비화국권 회복의 상징: 

중앙청은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상징적 건물이었기에, 이곳에 태극기를 올린 것은 단순한 점령을 넘어 수도 탈환과 국권의 복구를 대내외에 선포하는 행위였습니다.
✔ 맥아더 장군의 감탄: 맥아더 장군은 미 해병대가 아닌 한국 해병대가 먼저 태극기를 올렸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 해병대는 정말 용감하다"며 극찬했다고 전해집니다.

✔ 기념물: 현재 전쟁기념관과 인천상륙작전기념관 등에서는 이 역사적 순간을 담은 사진과 박정모 소위의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서울수복 중앙청 태극기 계양
이미지정보: (서울=연합뉴스) 윤동진 기자 = 23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67주년 서울 수복 기념행사에서 태극기 게양 퍼포먼스가 진행되고 있다. 2017.9.23mon@yna.co.kr


3. 활약의 결과

이 공로로 박정모 소위는 을지무공훈장을 받았으며, 한국 해병대는 '귀신 잡는 해병'에 이어 '무적 해병'이라는 명성을 더욱 굳건히 하게 되었습니다.



서울 탈환 후 이승만 대통령 통치권 회복


서울 탈환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행보는 수도 서울로의 복귀(환도)와 통치권 회복, 그리고 북진 통일의 의지를 분명히 하는 데 집중되었습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역사적인 '수도 환도식' (1950년 9월 29일)

서울이 완전히 수복된 이튿날인 9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과 함께 중앙청(구 조선총독부 건물)에서 거행된 수도 환도식에 참석했습니다. 통치권 반환: 맥아더 장군은 "유엔군을 대표하여 대한민국 정부에 수도 서울을 돌려드린다"고 선언하며 이승만 대통령에게 통치권을 공식적으로 인계했습니다.
✔ 태극무공훈장 수여: 이 대통령은 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맥아더 장군에게 감사의 뜻으로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습니다.

2. 대국민 메시지와 연설

환도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감격에 찬 연설을 통해 국민들을 위로하고 향후 계획을 밝혔습니다. 
✔ 감사와 격려: 국군과 유엔군의 노고를 치하하며, 고난을 견딘 서울 시민들을 위로했습니다.
✔ 북진 통일의지 천명: 단순히 38선을 회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번 기회에 한반도를 공산 세력으로부터 해방하고 통일을 완수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3. 북진 명령과 38선 돌파

미국 정부가 중공군의 개입을 우려하여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을 망설일 때, 이승만 대통령은 단호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 독자적 북진 지시: "38선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국군 제3사단에 38선 돌파를 명령했습니다. 이에 따라 10월 1일 국군이 최초로 38선을 넘었으며, 이를 기념해 훗날 '국군의 날'이 제정되었습니다.
✔ 평양 방문: 10월 19일 평양 탈환 이후, 10월 30일에는 직접 평양을 방문하여 평양 시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통일의 희망을 다지기도 했습니다.


4. 사후 처리와 행정 복구

서울 수복 후 정부는 즉각적으로 행정 기능을 복구하고 부역자 처벌 및 치안 유지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부역자 심판 등과 관련한 엄격한 조치가 내려지며 사회적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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