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나타났다 사라진 만주국(滿洲國)대비 청(淸)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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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 나타났다 사라진 만주국(滿洲國)과 청나라 개요 Qing Dynasty and Manchukuo 일본 관동군이 세운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프이 만주국의 건국과 존속 기간을 다루지만 청나라가 등장 한 것은 일본군이 만주국을 설립하면서 청나라의 프이를 왕으로 옹립하여 청나라의 계승처럼 구몄기 때문에 청나를 소환 하게 된 것입니다.   만주국은 1932년 일본 제국 관동군이 만든 만주사변 이후 만주 지역을 점령하여 세운 괴뢰국입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면서 만주국도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 국가입니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라고 세운 프이와는 별개로 청나라와는 상관없는 국가입니다. '반짝 나타났다 사라졌다'는 표현처럼, 불과 13년 5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만주지역에 존재했습니다.  만주국(滿洲國) 지도 만주국(滿洲國)의 탄생 만주사변:  1931년 9월, 일본 관동군은 만주 침략을 위한 구실로 유조호 사건(류탸오후 사건)을 조작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군사력을 동원해 만주 지역을 장악했습니다. 괴뢰국 수립 : 일본은 국제 사회의 비난을 피하고자 꼭두각시 국가를 세우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1932년 3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국가원수(집정)로 내세워 만주국 수립을 선포했습니다. 일본의 실질적 지배: 만주국은 형식적으로는 독립 국가였지만, 실권은 모두 일본인 군인과 관료가 장악했습니다. 특히, 만주국 건국을 주도한 관동군이 모든 행정과 군사 권력을 휘두르는 구조였습니다.  짧은 존속과 허상 만주국의 체제: 1934년에는 만주국이 만주제국으로 바뀌고, 푸이는 황제에 오르면서 제정(帝政)이 시행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만주국은 '오족협화(五族協和)'와 '왕도낙토(王道樂土)'라는 슬로건을 내세웠으나, 이는 실질적인 통치를 위장하기 위한 선전에 불과했습니다. 강압적 통치 : 만주국은 일본의 식민 통치 기구로 기능하며, 일본인 이주민 관리와 군수 산업 개발 등 일본의 이익을 위한 통치...

류탸오후사건,柳條湖事件,이후 관동군(關東軍) 군사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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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탸오후사건,柳條湖事件,이후 일본 관동군 행보 The Liutiaohu Incident, and subsequent military actions of the Kwantung Army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 Liutiaohu Incident, 만주사변의 발단) 이후 일본군의 행보는 매우 빠르고 체계적인 침략 작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이 중국 대륙 진출의 명분으로 삼은 대표적으로 조작된 사건(자작극)이었습니다. 이 사건 이루 일본군 작전 행보 요약입니다. 류탸오후사건,柳條湖事件 당시 일본 세력권 1. 사건 개요 발생 일시: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20분경 장소: 중국 만주 펑톈(奉天, 지금의 선양) 근처의 류탸오후 철도 부근 내용: 일본 관동군이 자신들이 관리하던 남만주철도 일부 구간을 폭파하고, 이를 중국군의 소행이라 조작. 목적: 만주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함.  2. 일본군의 즉각적인 군사 행동 사건 직후 일본은 중국 측의 공격이라고 주장하며, 사전 계획된 군사 작전을 개시했습니다. 9월 19일 새벽: 관동군은 이미 준비해둔 작전계획에 따라 펑톈(奉天)을 기습 점령. 곧이어: 창춘(長春), 지린(吉林), 단둥(丹東) 등 주요 도시를 연쇄 점령. 약 5개월 만에: 1932년 2월까지 만주 전역을 군사적으로 장악. 이 모든 과정은 도쿄 정부의 명령 없이, 현지 일본군이 독자적으로 진행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곧 묵인·승인하여, 사실상 국가적 침략으로 전환됩니다. 3. 괴뢰국 ‘만주국(滿洲國)’ 수립 1932년 3월 1일: 일본은 점령지에 ‘만주국’을 세움. 형식상 황제: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옹립 → “국가 재건” 명분. 실질적 통치: 일본 관동군 사령부가 직접 통제. 이념 선전: “오족협화(五族協和)”와 “왕도낙토(王道樂土)”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식민 지배.

류탸오후사건,柳條湖事件,이후 일본군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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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탸오후사건(柳條湖事件)이후 일본군 행보 류탸오후 사건 이후 일본군은 이 사건을 만주 침략의 구실로 삼아 곧 바로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 전역을 점령한 후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수립해 식민지 화 합니다.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과 만주사변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 또는 유조호 사건)은 만주사변(滿洲事變), 9·18 사변, 펑톈 사변(奉天事變), 북대영 사건등으로 기록됩니다. 사건의 조작 :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 일부 장교들은 중국군 소행으로 위장하기 위해 만주 철도 선로를 폭파하는 자작극을 벌였습니다.만주 침략 개시: 일본군은 이 조작된 사건을 명분으로 내세워 중국군을 공격하고 만주 침략을 본격화했습니다. 당시 관동군의 이 같은 행동은 공식적으로 일본 중앙정부의 승인 없이 독단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진상을 알고 일본 정부는 사후에 이를 묵인했습니다. 만주 전역 점령:  일본군은 1932년 초까지 하얼빈을 포함한 만주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습니다. 만주국 수립과 통치괴뢰 정권 수립: 1932년 3월, 일본은 점령한 만주 지역에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앞세워 만주국을 세웠습니다. 실권 장악:  만주국은 외견상 독립국이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관동군이 장악했습니다. 일본인 관료들이 요직을 차지하며 만주국을 통치했습니다. 식민 통치 강화:  일본은 만주국을 통해 풍부한 만주의 천연자원을 활용하고, 이후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병참 기지로 삼았습니다. 국제 사회의 반응국제 연맹 조사단 파견: 중국이 일본의 침략을 국제 연맹에 제소하자, 국제 연맹은 리튼 조사단을 파견했습니다. 류탸오후사건,柳條湖事件,유조호사건,만주사변,滿洲事變,9·18사변,펑톈사변,奉天事變,북대영사건 ,만주식민지 ,만주국건국 ,마지막황제브이 ,만슈지헨 일본의 국제 연맹 탈퇴:  리튼 조사단은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고 만주국을 수립한 것이 부당하다는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일본은 1933년에...

류탸오후사건(柳條湖事件),만주사변(滿洲事變), 9·18 사변, 펑톈 사변(奉天事變), 북대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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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만주사변(滿洲事變), 9·18 사변, 펑톈 사변(奉天事變), 북대영 사건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 또는 유조호 사건)은 만주사변(滿洲事變), 9·18 사변, 펑톈 사변(奉天事變), 북대영 사건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 사건은 일본 관동군이 만주 침략을 위한 구실로 조작한 사건을 가리키며, 1931년 9월 18일 만주 펑톈(奉天) 교외의 류탸오후(柳条湖)에서 철도 폭파 사건을 일으킨 것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류탸오후 사건의 다른 이름들 해설.  만주사변(滿洲事變): 일본이 류탸오후 사건을 조작하여 만주를 침략한 전쟁 전체를 일컫는 명칭입니다. 9·18 사변(九一八事變): 사건이 일어난 날짜인 1931년 9월 18일에서 따온 이름으로, 중국에서 주로 사용합니다. 유조호 사건(柳條湖事件): 한자 독음을 한국식으로 읽은 명칭입니다. 펑톈(奉天)사변: 사건이 발생한 지역인 봉천(지금의 선양)의 이름을 따서 부르기도 합니다. 북대영(北大營) 사건: 일본군이 사건을 빌미로 중국군 병영인 북대영을 공격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 개요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 또는 유조호 사건)은 1931년 9월 18일 밤, 만주를 침략하려는 일본 관동군이 만주 봉천(현 선양) 근처의 류탸오후에서 남만주 철도 선로를 폭파한 자작극입니다. 일본은 이 사건을 중국 군대의 소행으로 조작하여 만주 침략의 구실로 삼았으며, 이는 만주 사변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 의 전개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 유조호 사건) 배경: 1930년대 초, 일본은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 위기를 겪고 있었고, 만주 지역의 이권을 둘러싸고 중국 국민당과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만주를 장악하기 위해 일본 군부 내 강경파들이 침략 계획을 세웠습니다. 사건 발생: 관동군 작전 주임참모 이시하라 간지 등이 계획한 대로, 1931년 9월 18일 밤 10...

마르코폴로 다리 사건,루거우차오 사건,7.7사변,Marco Polo Bridge Inc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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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폴로 다리 사건,루거우차오 사건, 7.7 사변,Marco Polo Bridge Incident 마르코폴로 다리 사건 개략 마르코 폴로 다리 사건 또는 루거우차오 사건이라 불리는데 중국에서는 7.7 사변이라고도 불립니다.  1937년 7월 7일 베이징 외곽의 루거우차오 盧溝橋(노구교)에서 일본군과 중국 국민혁명군이 충돌하며 중일 전쟁의 서막이 된 군사 충돌 사건입니다.  마르코폴로 다리 사건   발생 배경 1901년 의화단 운동 이후, 일본은 베이징 부근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는 권리를 얻고 있었습니다. 지리적 군사적으로 일본군과 북경에서 아주 가까운 무력이 마주하고있었기 때문에 작은 불씨만 발생해도 곧 큰 화력 충돌이 발생할 수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1937년 7월 7일 밤, 베이징 인근에서 야간 군사 훈련 중이던 일본군의 병사 한 명이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일본군은 강 건너, 즉 루거우차오 건너편에 있는 중국군 주둔지인 완핑현성(宛平縣城)에 수색을 하겠다고 요구했습니다. 이에 중국 측이 이를 거부했으며 , 일본군은 완핑현성으로 포격을 가했다고 합니다. 이에 중국 제29군이 이에 맞서면서 양측의 무력 충돌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주의 : 이 사건 최초 충돌 원인에 대한 진실은 약간의 견해차이가 있는 부분입니다.   마르코폴로 다리 사건 의 전개 및 결과 이 충돌은 전쟁으로 확대되는 양상으로 발전합니다. 처음에는 이 충돌이 국지적인 교전이었으나, 일본군이 대규모 병력을 이 지역으로 증파하고 대규모 무력 공세로 확대하면서 중국과 일본간의 전면적인 전쟁으로 번지게 됩니다. 중일 전쟁의 시작 이 사건의 진상은 현재도 양 측의 주장이 다르지만 , 확실한 것은 이 사건으로 부터 일본의 중국 본토 침략을 본격화하는 중일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한 역사를 쓰게되는 중대한 전환점이 된것입니다. 마르코   폴로 다리   명칭 이 다리는 과거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에 찬사로 언...